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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이슈 - 사건

광복절특사 이재용 프로필 나이 이명박은 제외 이유

by - 하루살이 - 2022.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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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돼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12일 "국가 경제를 위해 열심히 뛰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부회장은 이날 서울 서초구 법원종합청사 앞에서 복권 소감을 묻는 취재진에게 "감사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재용 프로필

출생

1968년 6월 23일 (54세)

서울특별시 휘장 서울특별시 용산구 CI 용산구

국적

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거주지

서울특별시 휘장 서울특별시 용산구 CI 용산구 이태원동

본관

경주 이씨 종문 경주 이씨 (慶州 李氏)

직업

기업인

현직

삼성그룹 총수

삼성전자 부회장

1968년 6월 23일에 태어났고, 경기초등학교, 청운중학교, 경복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87학번)를 졸업했다. 이후 게이오기주쿠대학 MBA를 취득했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학과 관련해서 첨언하자면, 조부인 이병철 회장이 "경영학은 나중에도 금방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는 인문학을 전공하라"고 권유해 동양사학과에 입학한 것이라고 한다. 그와 사촌지간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처음에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 진학했던 점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이재용이 동양사학과를 전공한 건 당시 경제대국이던 일본에 관심이 많던 부친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그의 학사 논문도 일본의 산업 공동화에 대한 것이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는 당시 중국사에서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위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이한 일이긴 하다. 다만 그래서인지 이재용도 아들은 상하이 외국인 학교에 보낸다는 말도 나오는 등중국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 외 경쟁률 스나이핑 때문에 동양사학과에 진학한 거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지만, 1987학년도 서울대 학과별 지원상황을 보면 당시 동양사학과는 2대 1의 제법 높은 경쟁률을 보였기 때문에 그것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울대 평균 경쟁률이 1.6:1이었고, 동양사학과는 문과 계열 중 5번째, 문이과 합쳐서(예체능 제외) 7번째로 경쟁률이 높았다고 한다. 1987년도 학력고사 배치표상에서도 동양사학과는 296점 이상으로 서울대 문과 계열 쪽에서는 4번째 구간이었으니 단지 서울대 입학만을 위해 무작정 과를 고른 게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재용의 대학 생활은 동기들 얘기 등을 종합해보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재벌집 도련님하곤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일단 부자 티를 별로 안내서 학적부처럼 아버지 직업란을 적는 곳이 있으면 회사원이라고 기입했다고 한다. 그래도 알게 모르게 주변인들은 그가 재벌집 자제라는 것 정돈 알고 있었는데, 재미있는 건 80년대 당시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는 운동권으로 유명한 학과였다는 것이다. 상기했듯 중국사 관련으로도 유명하다 보니 당시 동양사학과에 진학한 학생들은 사회주의 국가 중국을 공부하려고 오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학과 자체가 서민친화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운동권적 성향이 강했고, 그런 곳에서 무난히 지냈으니 성격도 괜찮았던 모양이다. 실제 지금도 동기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심지어 이재용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같은 과 1년 선배였던 최영인과 연인인 척 손을 잡고 시위에 참가해서 최루탄 맛을 경험하기도 했고, 전방 입소 거부 투쟁에 동참하기도 했다.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당시 대학생이라면 크게 낯설진 않은 풍경이기도 하지만, 무려 삼성 후계자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과 MT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해 당시 동기들과 각종 논쟁에 대한 토론도 즐겼다고 한다. 당시 동기생들에게 이재용은 '남에게 폐 안 끼치고 누구한테도 싫은 소리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모범생' 이미지였다고.[그사람] 이재용, 이 사람이 아버지를 이기는 길.

한편으로는 그 역시 평범한 당시 20대 청년답게 흠모하던 여학생과 몇개월 연애도 해보고, 승마 선수 경력을 살려 상무에 입대할지 아님 학사 장교로 입대할지 등 병역 문제 고민도 했다고 한다. 종국엔 1991년 11월 허리 디스크로 면제되긴 했지만. 그리고 한달 후인 1991년 12월 삼성전자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영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 삼성전자 내에서 경영기획팀 상무보, 경영기획팀 상무, 전무, 부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 등을 역임하며 승진했다.

1998년에는 조미료 미원으로 유명한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의 장녀이자 9세 연하인 임세령과 결혼했지만 2009년 합의 이혼했다. 현재 임세령은 대상그룹의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리고 2005년에는 막내 여동생 이윤형 양이 유학 중 극단적인 선택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도 겪게 된다.#

2014년 부친인 이건희 회장이 병으로 입원한 이후 삼성전자, 나아가 삼성그룹의 실질적인 총수가 되었다. 2015년 5월 15일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2016년 갤럭시 노트7 폭발 사고 이후 책임을 지고 등기이사의 자리에 올라 본격적으로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2020년 10월 25일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고 국정논란 의혹으로 감옥에 수감되는 바람에 명목상으로 삼성전자 부회장에 머물고 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기업 1인자이다. 2022년 7월 형집행 완료 처분이 되고 3대 회장 직함을 달 가능성이 높다.

 
 
 
 

2022년 8월 12일 광복절 특별 사면으로 신동빈·장세주·강덕수와 함께 특별사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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