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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이슈 - 사건

바이샤오옌 사건 대만 최악의사건 백효연 바이빙빙 프로필 나이 댜오아이칭

by - 하루살이 - 2022.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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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샤오옌 사건

白曉燕命案

1997년 4월 14일, 대만 신베이시에서 일어난 사건. 대만 범죄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오늘날까지 거론되는 사건이다. 물론 대만에서도 온갖 잔혹한 범죄가 발생하지만, 피해자의 연령, 사건이 전개되는 상황, 잔혹한 살해 수법 때문에 독보적으로 유명한 사건이다

바이샤오옌(白曉燕:백효연, 1980년 6월 23일~1997년 4월)은 대만의 배우 겸 가수인 바이빙빙(白冰冰:백빙빙, 1955년 5월 17일~)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거인의 별 등으로 유명한 일본 만화 스토리 작가 카지와라 잇키였으나 카지와라의 폭력과 바람기를 견디다 못해 이혼한 바이빙빙은 바이샤오옌을 임신한 상태에서 대만으로 귀국했고, 출산한 뒤 자신의 성을 붙여 키워왔다.

대만의 명배우로 소문이 자자한 어머니 덕에 TV에도 자주 모습을 보였지만, 바이빙빙은 딸을 유명인의 2세로 키우기보단 그냥 일반인처럼 키웠다. 이것이 사건의 원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지만.

1997년 4월 14일, 바이샤오옌은 평소처럼 학교로 등교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길가에서 범인들에 의해 유괴되었다. 범인들은 바이샤오옌을 납치하자마자 폭행 후 윤간하고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절단했다. 이들은 바이샤오옌의 반나체 사진과 절단한 새끼손가락, 그리고 그녀가 직접 쓴 메시지를 보내, 500만 신 대만 달러(한화 약 2억 원) 가량을 몸값으로 요구하며 협박했다.

4월 15일 범인들은 바이빙빙에게 돈이 준비되었는지 전화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4월 16일 범인들은 돈이 준비되었는지 다시 한번 전화를 하고 당시 바이빙빙은 바이샤오옌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몇 분 후에 바이샤오옌이 신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4월 17일 범인들은 바이빙빙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돈이 준비되었는지 물었고 범인들은 몸값을 받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는다.

이후 바이빙빙은 어찌어찌 해서 500만 달러를 마련해 범인들에게 건네주고 딸을 되찾으려 했지만, 경찰측의 누군가가 언론에 바이빙빙의 딸이 납치되었다는 정보를 흘리는 바람에, 몸값을 건네주기로 한 장소에 기자들이 먼저 진을 치고 있는 사태가 발생했고, 범인들은 결국 몸값을 받는 걸 포기했다.

결국 마지막 전화가 걸려온 다음날, 바이빙빙은 아침부터 기자회견을 열어서 기자들에게 "우리 아이는 백지의(무력한) 아이입니다. 제발 방해하지 말아주세요"라며 읍소했다. 어찌 보면 이 사건의 또 다른 가해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 기자들에게 울면서 부탁을 해야만 했던 이 기자회견은 그 자체로 씁쓸하면서도 아이러니한 부분.

이후 범인들은 매번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하자 분노하였고, 아지트로 돌아와서 바이샤오옌을 윤간하고 집단 폭행한 끝에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들은 시신의 손발을 묶어서 타이페이의 하수도에 유기했다.

바이샤오옌이 사망한 후에도 범인들은 바이샤오옌이 살아있다고 주장하고 바이빙빙에게 전화로 몸값을 요구했고 4월 25일 타오위안에서 거래를 하기로 했으나 범인들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같은 날 4월 25일, 경찰이 범인들의 아지트를 급습해 범인들 중 4명을 체포했고 나머지 3명은 도주했다.

바이샤오옌이 사망한 지 약 일주일이 지난 4월 28일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훼손이 심각해, 발견자는 처음에 사람이 아닌 돼지의 사체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법의관의 부검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질식사였으나 심한 폭행으로 간장이 파열되고 복강은 과다출혈로 부풀어 오른 데다, 늑골도 대부분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는지 머리카락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두 눈은 도려낸 데다 목이 졸려 죽는 과정에서 밖으로 튀어나온 것으로 보이는 혀도 잘려 있었다고 한다. 귀에는 폭죽을 집어넣어 그 폭발 때문인 듯 고막이 파열되어 있었고, 몸 안에는 두 개의 쇠파이프가 박혀 있었으며, 못도 무려 48개나 나왔다고 한다. 그녀의 시신을 검시한 베테랑 법의관은 "법의관 생활을 오래 했지만, 이토록 끔찍한 시체는 처음 봤다"고 크게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고 하니 말 다했다.

일부 대만 언론이 시신 발견시의 사진을 그대로 찍어 보도했고, 이 사진은 일본에까지 넘어가서 일본 언론들에도 보도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자들의 행태에 이전 피해자의 몸값을 건네려 할 때의 기자들의 기레기 행태까지 더해져 유족들은 크게 분노해, "기자 유죄"라고 적은 큰 플랜카드를 집 앞에 붙일 정도였다.

이렇게 참혹한 시신이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장례식은 가발을 씌우고 생전 얼굴을 본뜬 가면을 붙이고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주범격인 린춘성(林春生), 가오톈밍(高天明), 천진싱(陳進興)을 공개수배한다.

대만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당시 리덩후이 총통은 "범인이 저항하면 발포해 사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8월 18일 범인 세 명과 경관 800명이 타이페이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경관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범인 중 한 명인 린춘성은 6발의 총탄을 맞고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10월 23일, 다른 한 주범이 타이베이 성형외과에 난입해 "자신의 얼굴을 성형하라"고 강요했다. 의사가 협박을 받아 수술을 마치고 나자, 그 범인은 "내 얼굴을 봤으니 죽어줘야겠다"라면서 의사 부부를 살해하고, 간호사는 강간한 뒤에 살해했다. 그러나 11월 17일에 다시 경찰에 발각되었고, 범인중 한 명인 가오톈밍도 자살했다.

마지막 남은 범인 천진싱은 도주를 계속하다가, 11월 18일 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의 주재무관 관저에 침입해 5명의 인질을 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그러나 민진당의 셰창팅이 범인을 설득해 보겠다고 나서 직접 교섭한 끝에 결국 투항하여 체포된다.

이후 재판에 넘겨진 천진싱은 1998년 1월 22일 5건의 유괴, 강도, 살인에 대하여 모두 사형, 다른 폭행 사건 등으로 징역 59년 6월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인 1999년 10월 6일 사건 발생 2년 반 만에 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나머지 범인들 역시 사형까지는 아니지만 범죄에 걸맞은 처벌을 받았다. 다만 바이빙빙은 이것으로 정의가 실현된 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96년 중국 장쑤성 난징시에서 있었던 전대미문의 토막살인 사건이다. 별별 사건이 다 일어나는 중국이라지만 댜오아이칭 살인사건은 오원춘보다 더한 잔학함으로 대륙 전체를 충격에 빠트린 사건이었다. 정확한 피살 시간은 확인할 수 없어 시신을 발견한 1월 19일을 따 '난징 1.19 사건', '난징대학 1.19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피해자는 1976년 3월에 태어나 난징대학에 다니던 1학년 댜오아이칭으로, 농촌에서 갓 올라온 대학생이었다. 난징시으로 올라오기 전 그녀와 가까이 지냈던 고향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키 165cm에 쌍꺼풀이 없고 말을 빠르게 하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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