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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 광주 사태 42주년 쿠데타 군사독재(제5공화국) 전두환 최규하 정부 하나회(신군부) 국방부(계엄사령부) 날짜 영향 원인 이유

by - 하루살이 - 2022.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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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民主化運動

Gwangju Uprising

1980년 5월 광주 일원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하여 군부 등에 의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다수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슈피겔지의 사진

날짜

1980년 5월 18일 ~ 1980년 5월 27일

장소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시와 그 인근 지역

원인

12.12 쿠데타 이후 신군부의 5.17 내란 및 광주 시민들의 헌정질서 보호의도

교전 세력

최규하 정부

하나회(신군부)

국방부(계엄사령부)

내무부 치안본부

시민군

지휘관

대한민국 국군 주영복 국방부장관

대한민국 육군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대한민국 육군 이희성 계엄사령관

대한민국 육군 진종채 제2군사령관

대한민국 육군 윤흥정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

대한민국 육군 박준병 제20사단장

대한민국 육군 정웅 제31사단장

대한민국 육군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

대한민국 육군 신우식 제7공수여단장

대한민국 육군 최웅 제11공수여단장

대한민국정부 김종환 내무부장관

안병하 전남도경국장 →

대한민국 육군 정호용 특전사령관

윤상원 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 (†)

박남선 시민군 상황실장 그 외 다수

병력

계엄사령부 전라남북도 계엄분소

육군 제3공수여단

육군 제7공수여단

육군 제11공수여단

제20사단

제31사단

제10전투비행단

제3훈련비행단

전라남도 경찰국

시민군 다수, 시위대 다수

인적 피해

군인 23명, 경찰 4명 사망

군인 115명, 경찰 138명 부상

시민 165명 사망

76명 실종

3,515명 부상

결과

6월 민주 항쟁에 영향

계엄군 광주 점령

항쟁 세력인 시민군의 붕괴

군부의 민주화 저항세력 분쇄

영향

전두환의 권력 이양 및 11대 대통령 취임

군사독재(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작

광주 화정동을 넘어 진격하는 계엄군 전차대대

카빈 소총이으로 무장한 광주 시민군.

해방광주 시기 광주 전남도청 앞에서 열리는 시민군 총궐기대회에서의 시민군들

27일 진압작전후 계엄군에게 포박당한 생존 시민군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의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 정태춘, '5.18'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과도정부의 중대발표와 또 자제하고 관망하라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17일부터 학업에,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했습니다. 이에 우리 시민 모두는 의아해 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아! 설마,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귀를 잘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잘리우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너무나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날조, 유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 광주 시민군, 1980년 5월 25일 광주시민군 궐기문


5·18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 민주화운동은 넓게 보면 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부터, 좁게 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이 내란하고 폭동을 저질르고 이에 저항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처음에는 신군부에 의해 광주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점차 시대가 변하고 진실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등으로 부르며, 보통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적고 있다.

지만원을 위시한 극우파에서는 전두환의 주장을 답습하여 무장 폭동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대한민국 대법원에서는 여러 차례 그러한 주장에 근거가 없음을 재확인했고, 정당한 저항권 행사로 여겨진다. 헌법재판소는 저항권 행사에 대해서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에서 "개별 헌법조항에 대한 단순한 위반이 아닌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전체적 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거나 이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고, 이미 유효한 구제수단이 남아 있지 않아야"하며 그 경우에도 "민주적 기본질서의 유지, 회복"을 목표로 해야만 정당성을 지닌다고 판시했는데(2013헌다1) 1980년 광주의 사례가 이에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설령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위법성이 조각된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였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반란군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킨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든 계엄령과 대학교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계엄군은 시위를 진압하려고 폭동적 시위진압을 고수, 무고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성폭력 등의 성범죄를 저질렀으며, 불법처형을 하고 민간인을 향해 총기까지 사용하면서 광주를 대대적으로 탄압했고, 더이상 참을 수 없던 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 대항했지만 신군부에 의해 철저히 진압당했다.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진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 여파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의가 다시 떠올랐다.

계엄군들은 시위와 전혀 상관없는 지나가던 일반 시민들까지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쏴 죽인 것은 물론 부상당한 시민들을 불법으로 처형하고 물놀이하던 아이들까지 쏴 죽였으며, 헬기 사격과 강간 등을 자행하기도 했다.

2000년 5월 19일 MBC 스페셜 (충정작전, 그후 20년) 방송 내용에 따르면 특전동지회 회원들이 7공수여단 출신 최영신이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의 진실을 증언하자 오히려 그에게 협박은 물론 테러까지 가한 사례가 있었다.

게다가 1989년 3월 9일에는 KBS가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프로그램 '광주는 말한다'에 대해 항의 농성을 벌이며 "여기가 대한민국이냐, 북한이냐? 너희는 빨갱이 방송국이다"라고 비난하며, 같은 연도에는 특전동지회 회원 2명이 ‘어머니의 노래’를 만든 김윤형 프로듀서 등 3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런 사건을 저지르고도 1998년 뉴스 인터뷰에서는 피해자 행세를 했으며 게다가 몇년 뒤에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했을 때 또 한 번 '화려한 휴가'가 거짓이라고 주장하며 ''거짓으로 국민과 군 간에 적대감을 조성한 것 같이 이번 기자간담회에서 국민과 특전사를 이간질 및 적대감을 고취시키는 그 저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혀라" 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김영삼의 기자회견문 (1980년 5월 20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담화문 (1980년 5월 21일)

관련 자료중 광주사태라는 단어가 간접적으로나마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80년 5월 20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기자회견문이다. 김영삼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5.17 계엄 전국 확대와 광주에서의 유혈사태를 모두 "사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돌려 언급했으며, 이는 광주사태라는 단어가 군부의 왜곡으로 만들어진 단어라는 근거로 제시되는 1980년 5월 21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담화문보다 하루 이른 날짜다.

민주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

목포시민투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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