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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인 이야기/예능- 방송

PD수첩, 개구리 소년 와룡산에 묻힌 진실 타살 저체온증 자연사 논쟁 故우철원 범행도구 버니어캘리퍼스 1339회

by - 하루살이 -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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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Frog Boys

1991년 5명의 어린이들이 실종되었을 당시, 이들의 사진이 걸린 트럭 앞에서 가족과 후원회 회원들이 행인들에게 소년들의 사진 등이 인쇄된 전단을 나눠주고 있다.

실종 1년 후, 아이들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포스터. 통계청 화폐가치 환산에 따르면 1992년 당시의 보상금 42,000,000원은 2022년 5월 기준으로 101,556,000원이다.

발생일

1991년 3월 26일 (실종)

2002년 9월 26일 (시체 발견)

발생 위치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서구 상리동 산37 일대

(와룡산)

범죄 항목

살인

가해자

불명

피해자

우철원, 조호연, 김영규, 박찬인, 김종식

1991년 3월 26일, 대구직할시(現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 지역에 살던 5명의 국민학생들이 인근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동반 실종되었다가, 실종 후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26일에 백골로 발견된 사건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31년, 아이들의 백골이 발견된 지는 20년이 흘렀지만 현재까지도 범인을 잡지 못한 상태다.

범인의 윤곽은커녕 피해자의 신원이나 행방조차 밝히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빠진 사건은 전국적으로 많이 보도되었지만, 이렇게 불가사의한 사건의 경우 당대의 이슈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수사 인력의 편중으로 인해 초동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묻힌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대천 영유아 연쇄유괴살인 사건의 경우 개구리 소년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고, 범인과 범행 수법 역시 오리무중이지만, 개구리 소년 사건만큼의 수사와 관심을 받지 못해 인지도가 훨씬 부족한 실정이다.

이 사건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불릴 정도로 전국민들의 주목을 받았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끝내 범인을 찾아냈다.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은 범행 동기가 확실하고 유력 용의자가 특정되었다.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의 경우, 아이를 유괴하고 협박 전화를 건 범인의 목소리를 성문 분석한 결과 이형호 군의 생모 쪽 사촌동생인 이상재(가명)와 일치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성문은 개인에게 고유하므로, 비록 아이를 유괴한 범인이 따로 있고 다른 공범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협박 전화를 건 인물이 이상재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재에게 무혐의 처분이 내려진 이유는 당시 이상재가 알리바이를 입증한 것과, 경찰 측에서 해당 사건의 범인을 1명으로 간주하고 수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건과 정반대로 이 사건은 밀폐되지 않은 산 속에서 5명을 한꺼번에 살해한 범행 수법과 대대적인 수색이 이어졌음에도 윤곽조차 잡지 못한 범인, 알려지지 않은 살해 이유, 그리고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불가사의 투성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미제사건 중 가장 의문점이 많은 사건을 꼽아보라면 여전히 많은 이들이 하나같이 언급하는 사건 중 하나이다.

아래에서도 자세하게 후술되었으나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의문이 아닌게 없다.

우선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훤히 아는 인근 산이었다는 것과 흔적이나 범인의 정체, 살해 수법등 모든 것이 수수께끼와 같고 그래서 더욱 의혹이 들 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정확히는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채집하려고 집 근처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되었는데, 사건 초기에 도롱뇽이 개구리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5명의 아이들은 일명 ‘개구리 소년’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개구리 소년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도롱뇽 알을 구하러 나갔다가 실종되었다고 보도하면 당시 개구리와는 달리 도롱뇽을 잘 모르는 전국의 많은 아이들이 도롱뇽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지니고 괴생명체로 오인할까 봐 일부러 인지도가 높은 개구리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구리와 달리 도롱뇽은 국내 서식지가 제한적인지라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도 아니기 때문에, 개구리 소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다만 사건 당일 5명의 아이들이 가는 길에 만난 친구에게는 탄두를 주우러 간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와룡산에 있었던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에서 흘린 탄피를 주우러 갔을 가능성도 있다.

대중들 사이에서는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나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 혹은 간단하게 개구리 소년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정식 사건명은 대구 성서초등학생 실종 사건이었으나, 2002년 9월 26일에 아이들의 시신들이 발견되면서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 변경되었다.

사망자

우철원(禹喆元): 국민학교 6학년

조호연(趙浩衍): 국민학교 5학년

김영규(金榮奎): 국민학교 4학년

박찬인(朴燦印): 국민학교 3학년

김종식(金鐘植): 국민학교 3학년

2002년 9월 26일, 대구 달서구 와룡산에서 아이들의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확인 결과, 1990년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개구리 소년’들로 판명됐다.

유골 발견 직후 경북대학교 법의학교실 팀은 6주간 신원확인 및 사인 규명 작업을 벌였고, 두개골에 있는 손상흔을 근거로 이들이 타살되었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범인이 누구인지, 범행 도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개구리 소년의 범인을 알고 있다”. ‘개구리 소년 사건’을 둘러싼 가설들

지난 6월, 한 인터넷 게시판에 ‘개구리 소년 사건’의 범행 무기를 알고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범행도구는 버니어캘리퍼스이며, 불량한 학생들이 저지른 범행이다’라고 주장했다.

故우철원 군 두개골의 우측 X자 손상 흔적이 버니어캘리퍼스의 흔적과 일치한다는 주장이었다.

해당 글은 인터넷상에서 관심을 끌며 개구리 소년 사건에 대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무렵 PD수첩에 한 제보가 왔다.

제보자는 ‘개구리 소년’과 같은 학교에 다닌 동창이었으며, 1991년 실종 사건 발생으로부터 3일 전 와룡산에서 친구들 4명과 함께 공포스러운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날 그가 겪은 일은 무엇인지, ‘개구리 소년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제보자를 직접 만났다.

“실종 당일 그날은 춥고 비가 왔다“. 타살과 대립하는 자연사 주장

일각에서는 타살이 아닌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주장한다.

대구경찰청 강력과장을 지낸 김영규 전 총경은 “개구리 소년 아이들이 와룡산에 놀러 갔다가 기상 악화로 비가 내려 피하던 중 저체온증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다”라며 주장했다.

1991년 실종 당일 기온은 최저 3.3도, 최고 12.3도였으며 당일 18시 20분부터 비가 왔기 때문에 비를 피하는 과정에서 산속에 조난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김영규 전 총경은 깨진 돌조각을 보여주며 두개골에 있는 손상흔은 낙석으로 생긴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타살을 주장하는 이들은 저체온증이라면 두개골의 인위적인 손상흔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자연사인지, 타살인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20년간 이어지고 있는 지금, PD수첩은 손상흔을 만들어낸 도구가 무엇일지 실험했다.

가설에 대한 검증.

‘개구리 소년’ 범행도구 비교 실험 진행

PD수첩은 사람의 두개골 강도와 가장 흡사한 돼지 뼈, 생체 역학 테스트 블록에 쪽가위, 공업용 가위, 버니어캘리퍼스, 용접 망치, 호미 등 다양한 도구들을 실험하며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비교 실험을 진행했다.

두개골 손상흔과 동일한 흔적을 남긴 도구는 과연 무엇이었을지 PD수첩에서 공개한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개구리 소년 사건’은 죽음의 원인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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