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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이슈 - 사건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 흉기 버니어캘리퍼스 주장 누리꾼 가설 주목 뽀대기 그것이알고싶다분석 사망자 유골

by - 하루살이 - 2022.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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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씨는 "네이트 뉴스 댓글은 물론 유튜브 댓글로 수도 없이 떠들었지만 누구도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라며 "산동네에서 자라본 남자들은 알 거다. (당시) 개구리까지 키운다며 올챙이나 도롱뇽을 잡으러 많이 갔다"며 운을 뗐다.

그는 개구리소년 피해자의 두개골 손상 흔적 사진을 제시하며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어? 버니어캘리퍼스잖아'라고 자동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왔다"며 "같은 크기의, 두개골을 직접 뚫지는 못한 데미지가 여러 개 한 곳에 집중됐다는 건 그 흉기로 아무리 있는 힘껏 세게 때려도 저게 맥시멈 데미지란 소리다.

1991년 5명의 어린이들이 실종되었을 당시, 이들의 사진이 걸린 트럭 앞에서 가족과 후원회 회원 등이 행인들에게 소년들의 사진 등이 인쇄된 전단을 나눠주고 있다

실종 1년 후, 아이들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포스터. 통계청에서 제공하는 소비자 물가지수를 이용한 화폐가치 환산(#)에 따르면 1991년 당시의 (보상금) 42,000,000원은 2021년 기준으로 102,564,000원, 즉 1억 원이 넘는 거금이다

1991년 3월 26일, 대구직할시 달서구 성서 지역에 살던 5명의 국민학생들이 인근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동반 실종되었다가, 실종 후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26일에 백골으로 발견된 사건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31년, 아이들의 백골이 발견된 지는 19년이 흘렀지만 현재까지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한 상태다(#). 대한민국 3대 영구 미제 사건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정확히는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채집하려고 집 근처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되었는데, 사건 초기에 도롱뇽이 개구리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5명의 아이들은 일명 ‘개구리 소년’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개구리 소년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도롱뇽 알을 구하러 나갔다가 실종되었다고 보도하면 당시 개구리와는 달리 도롱뇽을 잘 모르는 전국의 많은 아이들이 도롱뇽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지니고 괴생명체로 오인할까봐 일부러 개구리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구리와 달리 도롱뇽은 국내 서식지가 제한적인지라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도 아니기 때문에, 개구리 소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다만 사건 당일 5명의 아이들이 가는 길에 만난 친구에게는 탄두를 주우러 간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와룡산에 있었던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에서 흘린 탄피를 주우러 갔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다.

대중들 사이에서는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나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 혹은 간단하게 개구리 소년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정식 사건명은 대구 성서초등학생 실종 사건이었으나, 2002년 9월 26일에 아이들의 시신들이 발견되면서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 변경되었다.

범인의 윤곽은커녕 피해자의 신원이나 행방조차 밝히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빠진 사건은 전국적으로 많이 보도되었지만, 이렇게 불가사의한 사건의 경우 당대의 이슈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수사 인력의 편중으로 인해 초동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묻힌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화성연쇄살인사건,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불릴 정도로 전국민들의 주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찾아낸 화성연쇄살인사건, 범행 동기가 확실하고 유력 용의자가 특정되었던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과는 정반대로 밀폐되지 않은 산 속에서 5명을 한꺼번에 살해한 범행 수법과 대대적인 수색이 이어졌음에도 윤곽조차 잡지 못한 범인, 알려지지 않은 살해 이유, 그리고 당대의 막강한 사회적 파급력으로 인한 전국민의 대대적인 관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불가사의 투성이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미제 사건 중 가장 의문점이 많은 사건을 꼽아보라면 여전히 많은 이들이 손꼽아 언급하는 대사건 중 하나이다

세간의 관심이 거의 사라졌던 2002년 9월 26일, 실종 11년 만에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오우근 씨에 의해 5명의 유골이 와룡산 중턱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구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 부지였으며, 50사단은 이미 1994년에 북구로 이전한 상태였다.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이 있어서 탄피가 많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인근 어린이들이 탄피를 모으기 위해 와룡산에 자주 올랐다는 제보도 잇따라, 일각에서는 오발탄에 의한 타살로 추정되었다.

발굴 이틀 후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다시 구성해 의욕을 보이는 듯했으나, 경찰들은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성급한 수사를 해 빈축을 샀다. 대구 달서경찰서 는 시신 발견 신고를 받고 출동한 후, 무슨 의도였는지 현장보존도 하지 않고 과학수사대도 부르지 않은 채 곡괭이 등을 이용해 땅을 파헤쳐서 현장을 훼손시켰다. 또 정확한 부검도, 현장감식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이 파헤쳐낸 유골만 봤으면서도, "상식적으로 봤을 때 타살 흔적은 거의 없는 거 같다."든지 "조난을 당했고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라고 주장해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자세한 전말과 이에 대한 반론은 후술.

여기서 경찰은 사건 현장을 건드려서 크게 훼손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그 당시 그것이 알고싶다에 보도된 영상을 보면 의경들이 삽질을 하고 형사들이 유골을 함부로 마대에 정리해 담아놨다. 이 꼴을 본 서울대학교 법의학과의 이윤성 교수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할 말을 잃었을 정도. 그래서 시신 중 감식반의 현장 감식을 받은 시신은 단 1구뿐이라고 한다.

결국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추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사망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범인도 알 수 없었으며, 범죄 도구도 불분명해서 경찰이 여러 도구를 가지고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다만 가장 유력한 범행도구는 용접 후 슬래그를 깨거나 긁어내는데 사용하는 용접망치, 일명 깡깡이망치다.

2003년에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했고, 2005년 11월 28일에 유족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소시효 연장/폐지를 촉구했지만 2006년 3월 26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며 2015년엔 내사마저 종결됐기에 이제 와서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처벌할 수 없다. 현재까지도 범인 또는 범인을 아는 사람이 자수하지 않는 이상 잡힐 가능성조차 안 보이며 후술하겠지만 설령 다른 사건으로 인해 이미 체포 후 수감되었는데 그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져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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